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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예부터 자연이 전하는 메시지를 삶 속에 담아내며 살아온 아시아 사람들. 그 흔적 중 하나인 무늬에는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아시아의 지혜가 숨어있다. 생명의 근원 태양, 평화의 상징 물고기, 다산을 빌어주는 석류와 포도 등 자연을 무늬로 만든 아시아 사람들은 그것을 다시 자신들의 의식주에 녹여냈다. 숫자로 표현하기도 어려운 까마득한 옛날부터 자연과 사람을 이어준 무늬. 지난 11월 9일부터 17일까지 구로 아트벨리 갤러리에서는 이러한 무늬의 이야기를 주제로 한 전시회가 있었다. 『꿈꾸는 무늬-아시안 코즈모스(Asian Cosmos)』가 바로 그것. 카자흐스탄, 중국, 이란 등 아시아 곳곳에서 촬영 된 다양한 무늬 사진을 보여준 이번 전시회에서는 무늬에 얽힌 비밀을 풀 수 있는 자리기도 했다.

태양, 달, 꽃, 동·식물 등 아시아 사람들에게 자연은 아름다움을 넘어서 신령스러운 존재였다. 그리하여 의미를 부여하고 혹은 신으로 모시며 자신들의 삶 가까이로 끌어 와 함께하고자 했다. 무늬는 이러한 아시아인의 마음을 담은 가장 대표적인 예다. 생명의 순수함을 의미하는 태양을, 각각 의미를 지닌 꽃무늬 등을 옷, 모자, 그릇, 이불에 담아 나쁜 것은 멀리 보내고 좋은 것은 불러들일 수 있다 믿었다.

태양, 석류, 포도, 학, 나비 등 자연을 선물로 여겼던 아시아 사람들은 그것을 보다 더 가까이 두고자 했다. 새로운 생명을 바라는 엄마는 석류를, 부모님의 장수를 기원하는 효자는 포도 무늬를 식기에 새기고 바늘 한 땀 한 땀에 가족의 건강과 풍요로움을 담아 희망을 품었다. 물론 이는 과학적 증명이나 수학적 공식으로는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아시아 사람들은 ‘마음’과 ‘정성’이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 믿었다.

자고 일어나면 쏟아지는 신제품 속에서 살아가는 요즘, 오랜 세월 자신들의 문화를 고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변화를 받아들인 사람들을 피해 더 깊은 산 속으로 몸을 숨겨 살아가는 그들, 소수민족. 가진 것 없어 보이지만 많은 것을 안고 사는 그들의 삶에는 무늬 역시 풍부하다. 새해 축제날에는 더욱 아름답고 고귀해지도록 돕는 수호자인 불사조 무늬가 들어간 의상을 입고 매운 내를 풍기는 고추를 무늬에 새겨 액운을 없애고자 했다.

어릴 적 국자에 설탕을 녹여 소다를 넣은 후 굳히면 완성되는 일명, 달고나. 국자로 눌린 설탕 덩어리에 새겨진 하트나 별 모양을 흠집 없이 완성하면 ‘한개 더’ 기회가 주어지기도 했다. 어차피 전부 입안에 들어가게 될 것을 조마조마하며 무늬를 완성하느라 쪼그려 앉은 다리가 저린지도 몰랐던 것 같다. 이런 달달한 추억을 간직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새삼스럽게 옛 추억이 떠올랐던 이유는 전시회장을 들어서자마 한 벽면을 가득채운 달고나 때문이었다. 전시가 열리는 동안 마련된 다양한 특별 프로그램 중 하나였던 ‘아시아 무늬를 먹다’는 퀴즈를 풀면 달고나가 주어지는 행사였다. 벽에 붙은 달고나에서 풍기는 단내에 아이들은 침을 삼키고 어른들은 옛 추억에 젖게 만들며 색다른 체험을 제공했다.

베트남 사파는 하노이에서 밤 기차를 타고 꼬박 16시간을 달려 라오카이(LaoCai)에 도착, 다시 미니버스에 몸을 실어 2시간을 더 들어가야 도착할 수 있는 오지다. 인도차이나에서 가장 높은 산인 해발고도 3.143m의 판시판산(Phan Xi Pang)이 있어 관광객의 대부분이 트레킹을 목적으로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몇 년 전 겨울, 여행으로 처음 사파에 도착했을 때, 마을은 안개로 뒤덮여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모든 것이 낯선 이국땅에서 짙은 안개는 더 많은 긴장을 하게 했다. 마치 아무것도 보여주지도, 알려주지도 않을 것이라는 침묵의 경고 같기도 했다. 하지만 호기심 많은 여행자는 발을 멈추지 않고 천천히 마을 구석구석을 밟았다. 안개 속은 답답함 자체였지만 한 발 다가가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였다. 그렇게 한참을 헤매고 나서야 안개는 침입자를 향한 침묵의 경고가 아니라 친구에 대한 환영의 인사라는 걸 깨달았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은 먼저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마을 공원에서 베트남 소수민족 중 몽족인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그녀는 돋보기안경을 아슬아슬 코에 걸고 굵은 손가락으로 작은 바늘 땀을 내느라 분주했다. 앞에는 모자며 옷이며 동전지갑 등이 놓여 있었다. 완성품에 익숙해진 여행자에게 손바느질로 물건을 만들어내는 그녀의 작업은 꽤 흥미로웠다. 멋쩍은 웃음으로 양해를 구하고 옆에 앉아 본격적으로 지켜보기로 했다. 쪽빛 천에 색색의 실로 한 땀 한 땀 꿰매 무늬를 내는 모습. 한 시간 넘게 바느질을 해야 겨우 무늬 하나가 완성이 됐다. 긴 시간을 들여야 하는 작업은 꽤나 성가시게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피곤한 기색 없이 작업을 이어갔다. 간혹 멀뚱히 앉아 작업을 지켜보는 성가신 여행자에게 온화하게 웃어주기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많은 것이 낯설었지만 이상하리만큼 그녀의 옆자리는 편안했다. 그 후 아무것도 없는 작은 마을을 찾았던 여행자는 긴 여행 기간의 대부분을 그녀의 옆자리에서 보냈다. 그리고 말도 통하지 않고 이름도 몰랐지만 표정이나 손짓으로 대화가 가능했던 우리는 그렇게 친구가 됐다.

그리고 몇 년 후, 이번 전시회 소식을 듣고 무늬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구로 아트벨리 갤러리를 찾았다. 6개 주제별로 진열된 사진과 대사관 등의 도움으로 구해진 실물 자원이 전시회장을 채우고 있었다. 익히 봐 왔던 무늬에 혹은 처음 보는 무늬를 만날 수 있는 전시회였다. 그 중 여인네들이 둥글게 모여 앉아 바느질을 하는 사진 한 장에 문득 어릴 적 추억이 떠올라 발길을 멈추게 했다. 거실에 이불호청을 펼쳐놓고 바느질을 하던, 초등학교 입학 기념으로 꽃무늬를 수놓은 가재손수건을 가슴에 달아주던 할머니의 추억이 떠올랐다. 기억은 자연스럽게 할머니에서 몇 년 전 사파에서 만났던 몽족 할머니로 이어졌다. 사는 곳도 하는 말도 먹는 것도 다르지만 전시회에서 만난 사진 속 사람들, 몽족 할머니, 그리고 내 할머니는 모두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1센티미터도 안 되는 작은 바늘땀을 잇고 이으면 좀 더 행복과 가까워질 수 있다 생각했고 작은 무늬가 사랑하는 가족이, 친구가 좀 더 따뜻하고 건강해질 수 있다 믿기에 말이다. 면적 4,397만 6000㎢ ‘아시아’ 라는 무늬는 그렇게 하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