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문화 아시아

편집부, 대학생기자단 3기 홍현아

1980년 내란음모죄로 감옥옥살이를 해야만 했던 시인 고은. 시인은 암실 같은 어둡고 차디찬 감방 안에서 자신이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자 다짐한다. 그리고 그 다짐은 30년이라는 긴 시간을 거쳐 ‘만인보’라는 이름의 연작시집으로 탄생했다. 자신이 만난 사람들을 통해 역사의 아픔과 진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시인은 마지막 네 권에 80년 5월 광주의 이야기를 담았는데 광주에서 시작 해 광주에서 끝난 셈이다. 그런 이유에서일까. 2010 광주비엔날레의 주제 역시 ‘만인보(萬人譜/10,000Lives)'다. 지난 9월 8일부터 11월 7일까지 두 달 여 동안 열린 광주비엔날레. 31개국에서 온 134명 작가가 말하는 ’만인보‘는 과연 어떤 모습일지 들여다보자.

제8회 광주비엔날레는 이미지들이 어떻게 조작되고 순환되며, 훔쳐가고 교환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탈리아 출신의 전시기획자인 마시밀리아노 지오니(Massimiliano Gioni·37) 예술 총감독은 “예술의 역사는 대부분 사람이 사람을 바라보는 것에 관한 것이거나, 신체를 응시하는 시선, 또는 우리 자신을 대신 할 수 있는 것으로 창조된 대상이나 인물들에 관한 것”이라고 피력했다. 그는 이어 “우리는 고대 신화로부터 이미지들이 연인의 그림자를 표현해내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또 “이미지들은 유년기에 대한 향수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소중한 사람들과 가까워질 수 있도록 해 주며, 활력을 불어넣어 주기도 한다. 나는 아이콘 숭배의 병이 지속되는 상태, 이미지들에 대한 광적인 탐닉 등을 이번 광주비엔날레를 통해 탐구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제8회 광주비엔날레의 전시는 특별히 인물에 초점을 맞춘 다양한 영역의 미디어 작품을 망라하여 사람들의 이미지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끌어들여 보여준다. 그 집착의 대상은 사람들이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내는 대체물과 모형들, 아바타들, 그리고 자기 자신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을 대신할 수 있는 것들도 포함한다.

30권에 달하는 시인 고은의 연작 서사시의 제목 <만인보>를 그대로 딴 이번 비엔날레는 총감독 마시밀리아노 지오니의 해설처럼 이미지에 중독된 현대적 삶/미술에 맞춰졌다. 기존 행사 때보다 사진매체의 비중이 높아진 이유다. 고은의 시가 그러하듯 광주 비엔날레의 <만인보> 또한 애착의 대상을 이미지화시켜 소장하려는 현대인/미술의 줄기찬 욕구를 추적했고, 당대 미술이 직면한 위기감도 겸허하게 성찰했다. 신작으로 채워지기 일쑤인 디스플레이 방식도 20세기 초반 해럴드 애저튼이 고안한 초고속조명 사진부터 20세기 중반 황금기의 거물들을 거쳐 당대 신흥 주자까지 연대 제약을 두지 않았다.

디저트는 메인요리와 조화를 이루며 식사의 품위를 높여주는 일종의 장식적 혹은 보조적 메뉴이지 생계를 유지시키기 위한 음식은 아니다. 그러나 훌륭한 식사에서 디저트가 빠진다면 그것은 성찬(盛饌)이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술 또한 우리 삶 속에서 디저트와 같은 존재이다. 먹고사는 것과는 크게 관련이 없어 보이고 예술 몰라도 사는데 지장은 없지만, 만약 예술에 대한 관심을 조금만 기울인다면 작게는 나의 패션, 나의 자동차, 나의 집을 꾸미는 일부터 시작한다면 주변의 사소한 것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질 것이다. 예술이 아우르는 세계는 의외로 광범위한 것이라 아름다운 것을 보고 감흥을 느끼는 것뿐만 아니라, 사소한 것 일상적인 것, 타인이나 나 이외의 세계에 대한 배려와 관심 등등 우리가 예상치 못한 다양한 정신적 풍요로움을 가져다 줄 것이다.

유재명의 작품에는 부활과 자유의 상징인 나비가 등장한다. 그는 애벌레가 목숨 건 자기변태 과정을 거쳐 아름다운 나비가 되는 모습에 고난과 역경을 통해 성숙해 가는 인생살이를 투영하고자 한다. 거의 작품은 몇 개의 프레임 구조물 안에 갇혀 있는 나비와 화면 전체에 확대되어 있는 나비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규정 지워 진 현실과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의 격차를 나타내고 있는 듯 하다.

박설은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새내기 작가이다. 그러나 그녀의 기법은 초짜라 하기엔 대범함과 속된 말로 먹힐만한 신선한 매력을 지녔다. 그녀는 화선지에 먹을 먹이고 그 종이를 찢어서 캔버스에 붙이는 방식으로 검은 산들이 겹겹이 펼쳐진 신비스러운 풍경을 만든다. 그녀의 검은 풍경은 어디서 본 듯하지만 관념적 풍경이자 작가의 심리적 풍경이다. 검은 산위에 검은 산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막막함에서 젊은 날의 암담함과 고뇌를 읽는다. 먹의 농담에 의해 형성된 여명과도 같은 빛은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꿈과 청춘의 열정을 보는 듯 하다.

본래적 의미의 생명력을 다한 각종 고물이나 폐품을 이용하여 갈치를 비롯한 생선을 만드는 신양호가 이번 전시에서 색다른 시도를 강행한다. 그의 작업실 자체를 전시장 안으로 옮겨와 매일 미술관으로 출근하여 관람객 앞에서 공개적으로 작업을 진행한다. 완성된 작품의 전시가 아닌 전시기간 중 작가의 작업 활동 자체가 예술행위의 과정으로서 일종의 퍼포먼스이다. 전시기간 중 하나하나 완성되어가는 작품들은 시간의 흐름이라도 보여주듯 그에게 할애된 공간을 차곡차곡 채워 갈 것이다.

권진희는 어릴 적 영웅으로 여겨왔던 존재들에 대한 재검토를 시도한다. 전시실과 옥상정원의 통로역할을 하는 그녀의 작품은 폭력성의 상징인 권총의 이미지를 띤 비쥬커튼이다. 하지만 권총의 이미지 따위는 영롱한 비쥬의 반짝임에 묻힐 따름이다. 그녀는 영웅 뒤에 숨겨진 공격성과 폭력성, 그리고 그것들을 인식하지 못한 채 혹은 무의식적으로 동조하여 맹목적으로 열광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담아내고자 한다.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한 현실에서 벗어나 가상의 세계, 환상적 세계에서 위안을 얻고자 하지만 결국 그곳은 이미지의 세계, 허상의 세계일뿐임을 이야기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