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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아시아문화전당 베를린 통신원 김수현

2009년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20년째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하여, 타게스 슈피겔 등 일간지와 독일의 각종 시사?문화지 들은 올 한 해를 관통하는 다양한 기획시리즈를 다루기 시작했고, 역사적인 사건 이후 20년간의 변화를 재조명하는 다양한 문화 행사들이 대기 중이다.
그 중심에는 Kulturprojekte Berlin에서 진행하는 ‘20 Jahre Mauerfall’기획이 있다. 행사는 1년여에 걸쳐 베를린 도시 전역의 여러 장소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진행된다. 어느 도시나 역사적인 명암을 간직한 채 끊임없이 진화해 가기 마련이고, 그 변화와 발전은 기존의 흔적과 연결되어 있다. 장벽이 무너진 지 20주년을 기념하여 이를 문화적으로 재조명해 보려는 시도는, 그러한 역사적인 사실들이 과거에 박제된 것이 아니라 현재와 끊임없이 소통하며 살아있을 때 진정한 변화가 가능하다는 전제하에 출발한다.

행사는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전개 된다.‘변화의 베를린’(Berlin im Wandel)이라는 키워드로 일년간 시내 곳곳의 장소에서 그간의 변화를 조명해 보는 행사가 그 첫 번째이다. 베를린 전역에 걸쳐 진행되는 행사들은 박물관, 공연장, 시내 각종 문화기관 및 회사 등과 연계하여 공동의 작업을 통해 전개됨으로써 내용을 풍요롭게 만들어 간다. 구체적인 내용은 아래에서 좀 더 살펴보기로 한다.
5월7일부터 11월 14일까지 알렉산더 광장(Alexanderplatz)에서는‘평화적인 혁명(Friedliche Revolution)’이라는 주제로 야외(open-air)전시회가 열린다. 공공에게 무료로 개방되는 이 전시는 1989~90년 사이에 동독 내부에서 자발적으로 전개된 일련의 흐름들이 결국 어떻게 냉전 체제를 종식시키기에 이르렀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11월 7일부터 독일 통일 기념일인 11월 9일까지 브란덴부르크 게이트에서 펼쳐지는 ‘자유의 축제(Fest der Freiheit)’가 그 마지막을 장식하게 된다. 전세계에서 초청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진행될 이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도미노 이펙트를 이용하여 장벽이 무너지는 것을 상징적으로 재현하는 무대가 될 것이라고 한다.

포츠담 광장(Potzdamer Platz)을 빼놓고 지난 20년간의 베를린의 변화를 이야기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두 차례의 전쟁을 거치면서 폐허가 되었던 이 곳은 이제 통일 독일의 수도‘뉴 베를린’의 상징으로서 현대 건축의 다양한 면모가 집약된 복합문화단지로 변했고, 연중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이 광장의 한 가운데에 ‘변화의 베를린’행사를 안내하는 메인 인포파빌리온이 놓이는 것은 당연한 수순처럼 여겨진다. 통일 이후 포츠담광장이 한참 건설 중이던 시절 이미 이 곳에는 강렬한 붉은 사각형 형태의 인포센터가 설치된 적이 있었다. 건축적인 이슈로 화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6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방문하는 큰 성공을 거둔 바 있다. 이번 행사를 위한 새로운 파빌리온은 이미 그 과거와 느슨한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포츠다머 거리를 따라 광장 초입을 향해 걷다 보면, 대번에 선명한 붉은 색의 파빌리온이 눈에 들어온다. 커다란 계단 모양이다. 그 위로 걸어 올라가 광장 주변을 조망할 수 있고, 주변 장소의 변화와 역사를 간단하게 설명한 안내도 볼 수 있다. 계단 진입부의 반대쪽으로 돌아가보면 파빌리온 내부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다. 여기서는 베를린 전역에 걸친 다른 행사 장소에 대해 안내를 받을 수 있고, 각종 공연의 티켓 예매 등도 할 수 있다. 인포 박스 주변에 설치되어 있는 스탠딩 전시 패널은 각각의 장소들의 과거와 현재의 사진을 겹쳐놓아 그 변화를 실감케 해주고 있었다. 이 파빌리온은 27세의 베를린 예술대학(UDK)의 건축학도인 카타리나 바덴스(Katharina Bardens)의 작품으로 그 자신이 동독출신 아버지와 서독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가족사를 가진 바, 이번 프로젝트가 실현된 것에 특별히 더 의미 깊어 했다고 한다.

이 메인 파빌리온 이외에, 또 다른 이동 파빌리온이 각 시기별로 열다섯 군데가 넘는 시내의 주요한 장소를 돌아다니며 전시와 행사를 이끈다. 지난 1월 28일 마를렌느 디트리히 광장(Marlene Dietrich Platz)에서의 오프닝을 시작으로, 얼마전 일반 대중에게 리노베이션된 건물을 임시로 공개했던 신박물관(Neues Museum), 베를린 중앙역(Hauptbanhof), 동물원 구역(Zoo district/City West), 베를린 장벽 추모지(Gedenkstaette Berliner Mauer), 브란덴부르크 게이트의 파리저 광장(Pariser Platz) 등으로의 여정이 계획되어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동하는 파빌리온이 한 장소에 머무는 동안, 그 상공에 18m 크기의 붉은 화살표 모양의 헬륨 풍선을 띄워서 그 장소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베를린이 전체적으로 매우 편평한 도시임을 감안할 때, 약간 만화적이기까지 한 이런 제스츄어는 일단 쉽고 재미나서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실제 도시 안에서 수없이 이동하는 사람들의 흐름을 구체적인 장소로 불러들여 전시와 행사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전략이‘이동하는 파빌리온 프로젝트’의 중심에 있다. 미디어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한 도시의 역사나 장소에 대해 이미 익히 잘 알고 있다고 착각을 하곤 한다. 그러다가 실제 장소에서 각각의 개인들이 경험하는 물리적인 질감의 실체는 그것과는 전혀 다른 다채로운 세계다. 역사 속의 과거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은 그 변화의 장소들의 한가운데에서 만나면서 계속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갈 것이다.
공식 사이트인 www.mauerfall09.de 에서 실시간으로 진행중인 공연과 각종 장소에서 진행되는 전시와 행사를 안내하고 있다.

인포파빌리온에서 소개하고 있는 구체적인 장소들 중에 베르나우어 거리(Bernauer Str.)로 다음 행선지를 옮겨 보기로 한다. 남아있는 장벽의 흔적을 통해 베를린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장소이기 때문이다.

장벽의 흔적을 살펴보려면 Berliner Mauerweg(장벽탐방로)에 대해 잠시 언급해야 할 것이다. 베를린 시는 이미 Berliner Mauerweg 프로젝트를 통해, 한 때 도심 한가운데를 지나 갔던 옛 장벽의 길을 따라 도보자와 자전거 이용자들을 위한 문화 탐방로를 정비하였다. 베를린 시내 뿐만 아니라 인접한 브란덴부르크 주를 아우르는 총 연장160km에 달하는 이 프로젝트는 2002년에 시작하여 2006년에 완성된 것으로, 베를린 주정부의 경제?노동?여성분과와 연방정부의 도움으로 약 44억 유로의 예산을 충당할 수 있었다. 도심 속에서 무심히 걷다가도 누구나 쉽게 발견하고 접근할 수 있는 이 루트를 따라 돌아보는 문화 프로그램 및 여행코스도 매우 다양하다. 이러한 종류의 프로젝트는 지속적인 관리와 마스터 플랜, 완공 후의 유지 및 보수가 중요한데, 베를린 주정부는 2008년부터 이에 추가로 예산을 편성하여 진행 중이다.

베르나우어 거리는 오늘날 베를린 장벽을 추모하는 가장 대표적인 장소로서 장벽추모지(Gedenkstaette Berliner Mauer), 자료기념관(Dokumentationszentrum), 화해의 예배당(Kapelle der Versoehnung)등이 인접하여 모여있는 장소이다. 과거 구소련 관할 하의 동독과 프랑스 관할 하의 서독의 경계선이었던 이 거리는 베를린 장벽 건설의 출발지이기도 했다. 장벽추모지는‘메모리얼’이라는 이름이 주는 엄숙함과 달리 동상이나 기념비 하나 없이, 남아있는 장벽의 흔적과 함께 어우러져 조용하게 배경으로 자리한다. 어떤 이들은 차분하게 가라 앉은 고즈넉한 길의 장벽을 따라 걸으며 그저 지나가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 비워진 장소가 과거 동독 구역의 수많은 주민들이 길 건너편의 서독 구역으로 탈출을 시도하기 위해 집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다 국경 경비대의 총에 맞아 목숨을 잃기도 했던 장소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그 곳을 굽어보던 기념대의 전망대에서 좀 더 머물 수 밖에 없어진다. 기념관 내부에서는 좀더 손에 잡히고 피부에 다가오는 기록들을 만날 수 있다.‘베를린, 1961년 8월 13일’이라는 제목으로 진행 중인 전시는 장벽을 쌓기 시작한 8월 13일을 전후한 당시의 상황에 대해 육성 기록과 문서들, 증거사진들과 영상을 통해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베르나우어 거리일대의 이 물리적인 장소들은 사람들에게 역사에 대한 판단을 즉물적으로 강요하지 않는다. 지나간 역사의 그늘에 대한 명암을 단정짓지도 않는다. 다만 낱낱의 기록들을 집요하게 모으고 지속적으로 기획하여 보여줌으로써, 현재를 살아가는 개개인들이 스스로의 감성으로 그것을 마주하도록 열어둘 뿐이다. 이 일대는 2011년 완성을 목표로 하는 추가적인 확장과 디자인 계획이 진행 중이다. 현상설계에서 당선된Mola Winkelmueller Architekten의 디자인 안으로 지어질 인포파빌리온과 북역(Nordbahnhof)인근의 공원 정비, 마우어파크까지 이어지는 거리의 추가적인 메모리얼 연장 작업등이 그 내용이다. 변화는 과거와 현재를 지나 미래로 계속 이어지고 있는 중이다.

Kulturprojekte Berlin은 베를린 주정부 산하의 비영리 기업으로서 도시의 문화와 예술의 발전을 위한 프로젝트의 진행을 위임 받아 총괄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그들의 업무에는 문화적인 교육 프로그램, 복합적으로 연계된 문화 프로젝트 기획, 해외 문화단체들과의 교류, 각 예술분야를 연대한 축제의 기획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동안 ‘박물관의 긴 밤(Lange Nacht der Museen)’, ‘8월의 춤(Tanz im August)’, ‘Creative City Berlin’등의 행사를 성공리에 이끌어 오기도 했다. 도시의 문화 예술 네트워크를 창의적으로 구축하는 작업을 전담하는 별도의 체계적인 기관이 존재하고, 이를 위해 적극적으로 정부의 예산을 투자하고 있다는 점은 열린 문화 도시를 지향하는 베를린의 큰 장점일 것이다.
이번 20 Jahre Mauerfall 행사는 Kulturprojekte Berlin에서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굵직한 주요 행사 외에, 작은 갤러리, 클럽 및 극장, 지역 주민들, 예술가들과 연계하여 다채로운 기획을 진행하고 있다. 베를린 곳곳에 숨겨진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장소와 사람들 모두의 연락을 여전히 환영하고 있다는 공식홈페이지의 공고는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덩치가 큰 행사일수록, 작은 부분들까지 진정성 있게 수준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기에 계속 노력하기 위함일 것이다. 한 해 동안 진행되는 다양한 행사들이 어떤 반응과 결과를 얻으며 의미를 획득하는지 꾸준히 지켜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