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국 교수가 지휘대에 올랐다. 지휘자의 손이 올라가자 연주자와 관객은 모두 숨을 죽였다. 정적을 깨고 강렬하고 빠르게 연주되는 한국 전통 민요 ‘쾌지나칭칭’이 연주되었다. 이름도 생소한 낯선 악기들이 우리나라의 전통 민요를 연주하였다. 아니 11개국의 전통악기로 연주되는 ‘쾌지나 칭칭’은 이미 한국 민요가 아니라 아시아의 민요였다. 관객들은 ‘화아음(和亞音)’에 압도당했다. 각 악기군 별로 오케스트라를 배치하여 연주 중간에 악기군 별 합주를 가능하게 하였고, 악기군 별의 특성을 부각 시켰다. 연주자들의 얼굴에서 국가를 대표해서 왔다는 책임감과 세계 최초의 전통음악 오케스트라라는 자부심을 엿볼 수 있었다. 가슴을 꽉 눌러 호흡을 가쁘게 할 정도로 숨 막힐 듯 빠른 속도로 몰아치다, 어느 순간 긴장을 풀어주는 악기들의 어울림은 맛깔스러운 음악을 창조해냈다. 지휘자와 연주자, 그리고 객석의 다문화 가정들과 관객들은 한국과 동남아시아 최초의 하모니에 기립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첫 연주가 끝나고는 11개국의 전통악기 소개와 더불어 각 국가를 대표하는 전통음악을 연주하는 시간을 가졌다. 각 악기의 소리를 통해 악기의 특성과 오케스트라에서 어떤 역할을 맡게 되는지를 알 수 있었다. 11개국의 전통악기는 형태뿐만 아니라 악기를 구성하는 재료 또한 가지각색이었다. 전통 악기를 구성하는 재료부터 연주하는 방법까지 각 국가의 특성과 역사가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재료와 연주 방법, 그 역사가 모두 다르지만 ‘음악’을 연주하고 더하여 ‘음악’을 사랑하는 것은 인류 공통의 것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분신과 같은 악기를 연주하며 소개할 때 연주자들의 표정과 웃음에서 예술가로서의 자부심, 그리고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극단적으로 높은 음을 내는 악기를 비롯해서 다른 소리, 다른 연주 방법을 가진 악기들, 같은 모양이지만 다른 음정을 나타내는 악기들. 이 모든 악기가 한-아세안 전통음악 오케스트라의 한 부분이었으며, 각자의 역할이 있었다. 다양한 악기들의 소리와 비슷한 외형에서 민족과 문화는 다르지만 하나의 뿌리를 가진 아시아를 만날 수 있었다.






마지막 순서 합주. 각 나라별로 소개를 통해 다른 국가를 대표했던 연주자들이 다시 ‘한-아세안 전통음악 오케스트’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모였다. 한-아세안 11개국, 60여명의 오케스트라 연주단원들이 등장하자 관객들의 기대감이 예술 극장 전체를 가득 메웠다. 지휘자에게 열띤 성원을 보낸 뒤로는 극장은 동트기 전의 새벽처럼 고요했다. 지휘봉이 올라갔다. 아리랑이 울려 퍼지기 시작하였다. 2002년 월드컵 개막식곡으로 세계를 하나로 화합시켰던 ‘평화의 아리랑(박범훈 작곡)’이 김성국 지휘자의 편곡과, 한국과 동남아시아 11개국의 악기로 다시 태어났다. 객석이 술렁거렸다. 연주자들의 입에서 아리랑 구음이 나오자 객석에서도 아리랑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남녀노소 누구나 할 것 없이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가슴은 뜨거워졌고 아시아는 음악으로 하나가 된 것이다. 공연이 끝났다. 객석에서는 눈물 섞인 기립박수가 끊이지 않았다.






“저것이 엄마 나라의 노래란다.” 공연 직후 검은 피부의 립 글런(인도네시아, 이주 7년째)은 갈색 피부의 아들을 안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또한 자신을 ‘이 씨’라고 명명했던 스리랑카의 이 레이샤(이주 10년 째)는 오케스트라 구성 중 스리랑카가 빠져서 아쉽다는 말부터 먼저 꺼냈다. 매우 능숙한 한국말을 구사해 모두를 놀라게 한 그녀는 자신의 나라가 빠져 있었지만 익숙한 음악들로 조금이나마 마음의 위로가 된다며 쓴 웃음을 지었다. “아시아가 화합하는데 있어 음악이야말로 어떠한 말보다 유용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이러한 기회를 자주 마련하여 더 자주 뭉치고, 한국과 아시아가 더 친해 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다음번에는 꼭 스리랑카도 불러 달라는 말도 덧붙였다. “우리나라 음악이 제일 인상 깊었습니다. 오랜만에 들으니 정말 좋군요. 막상 있을 때는 몰랐는데.” 잠깐 눈시울을 붉힌 그는 슬픈 미소를 지으며 잠시 고국을 회상하는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인도네시아 출신 그로(이주 10년 째)에게는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도 가장 그리웠던 장면도 모두 인도네시아, 바로 자신의 나라였다. 회사 일 때문에 어릴 적 한국에 나와 다문화 가족을 이루게 됐다는 그로는 한국 땅에서 한국인답게 살면서도 피부색, 생김새가 틀리다는 이유만으로 가끔 색안경의 주제가 되거나 차별을 받을 때가 있다면서 아쉬워했다. 게다가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상처 받았던 마음들이 나중에는 당연한 듯 익숙해진다며 억지웃음을 짓던 그는 가족들에게 제일 미안하다며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래도 오늘 음악회를 보면서 많은 위로가 되었어요. 한국이 다문화 가정을 보는 시각이 조금씩이나마 변화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말을 마치면서 우스갯소리로 ‘어울려서 신났습니다. 그쪽도 그랬습니까?’ 되묻던 그, 한국을 이해하고 진정한 흥을 아는 그에게서 진득한 우리 고유의 향기가 물씬 풍겨 나왔다.



쉽게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사람들은 공연장 앞 광장에서도 한창 이야기꽃을 피웠다. 제법 추운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라오스 출신 대학생 아징(이주 3년 째)은 아쉬운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는 동료들과 함께 즐거움의 잔재를 나누고 있었다. “이번 공연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라오스 음악단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처음과 끝, 합동 연주였습니다. 한국의 음악을 각국 나라의 전통 악기로 들으니 얼마나 감동적이었는지 모릅니다. 정말 나라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주먹까지 불끈 쥐며 말하는 그의 모습에서 뿐 아니라 덩달아 환호하는 동료들의 함성에서도 이미 교집합 된 문화의 공동구역을 발견 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이번 공연을 통해 아리랑을 새롭게 접하게 되었다며 음률은 다르지만 느낌은 라오스의 전통 음악과 비슷해 애착이 간다고 전했다. 공연의 횟수를 늘려 달라고 입을 모아 말하던 그들은 이런 기회가 자주 있다면 라오스를 그리는 마음을 달래 고국을 방문하는 횟수도 줄일 수 있다며 익살스럽게 말했다. 장난기 가득 섞인 농담들이었지만 이번 공연이 새삼 커다란 위로가 되었음을 짐작 할 수 있는 좋은 예였다.





이번에 워크숍 시범 공연을 가진 ‘한-아세안 전통음악 오케스트라’는 오는 5월 24일 창설을 통해 서울 국립극장에서 첫 공연을 가질 예정이다. 5월 31일에는 제주도에서 ‘한-아세안 특별정상회담’ 기념 공연을 가진 이후 순회공연을 통해 아시아와 세계에 아시아의 음악의 아름다운 소리를 들려줄 예정이다. 그리고 이후 2012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개관하게 되면 문화전당을 주무대로 활동하게 된다. 워크숍 공연에서 단 두 곡의 합주로 관객들의 가슴을 울린 ‘한-아세안 전통음악 오케스트라’, 11개국의 연주자들이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미개척지에 첫걸음을 디뎠다. 줄만 있었던 오선지에 이제 음표 하나가 그려졌다.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곡, ‘한-아세안 전통음악 오케스트라.’ 그들이 완성한 음악은 어떤 것일지, 앞으로 펼쳐질 무대에 대한 기대감에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