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기축년(己丑年) ‘소(牛)의 해’이다. 우리 전통사회에서 소는 농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이롭고 중요한 가축이었다. 그래서 한국의 농부들은 소를 마치 가족처럼 여겼다. 반면 비육우를 많이 기른 서구에서는 소란 그저 살찌우고 길러서 잡아먹는 동물에 불과 했다. 그런 점에서 소라는 동물을 대하는 한국인의 감성에는 서구와는 분명 다른 구석이 있다. 이러한 차이를 드러내 주는 일화가 <대지(大地)>라는 소설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미국의 여류작가 펄벅이 연상하는 한국의 이미지에서 등장한다.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펄벅 여사는 한국을 이야기 할 때마다 항상 그가 목격했던 소와 농부의 이야기를 언급했다고 전한다. 그가 처음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는 시골 길에서 짚단을 실은 달구지를 한 농부가 몰고 가면서, 그 농부 스스로도 짚단을 가득 얹은 지게를 짊어지고 소와 같이 걸어가는 것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펄벅 여사가 보기에 소의 달구지에는 농부가 지고 있는 짚단을 실을 만큼의 여유가 충분히 있었음에도 농부는 굳이 지게에 짚단을 지고 가고 있었다는 점에 놀랐고, 이는 소의 힘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기 위함인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농부의 모습에서 그는 한국인의 따스한 심성을 느꼈고, 그때의 감동이 머릿속에 뚜렷하게 각인되었다고 했다. 말 못하는 동물이지만 사람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농부의 마음이 그녀에게 전해졌기에, 그 후 그녀가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사람들에게 그 얘기를 즐겨 말하곤 했음이 여러 출판물에서 확인된다. 어느 인터뷰 기사에는 펄벅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한국은 산하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씨도 너무나 곱습니다. 저는 그때 본 가슴 찡한 광경 하나만으로도 이미 한국에서 보고 싶은 것, 봐야 할 것을 모두 다 본 셈입니다." 그 후 펄벅은 한국을 소재로 <살아있는 갈대>라는 소설을 펴냈는데, 이 작품의 첫머리에서 한국을 "고상한 사람들이 사는 보석 같은 나라"라고 극찬하는 등 소설의 행간 곳곳에서 한국과 한민족에 대한 극진한 애정을 나타냈다. 그래서 이 소설이 출판되었을 당시, 뉴욕타임스에서는 이 작품을 펄벅이 한국에 보내는 애정의 선물이라는 표현을 썼다.

펄벅이 한국의 농부와 소의 모습에서 본 것은 ‘생명 존중’과 ‘나눔’, 그리고 ‘자연 사랑’과 같은 보편적인 가치였다. 그리고 그것들은 당시의 미국문명이 추구하던 효율과 경쟁, 대량생산과 소비의 가치와는 대비를 이루는 것들이었다. 오늘날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가 기계문명과 탐욕적 소비가 초래한 비인간화와 환경의 파괴라 한다면, 펄벅이 오래 전 한국의 소박한 농부의 일상에서 발견한 삶의 태도는 21세기 세계인이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를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한다면 그동안 우리가 미래를 준비하기 위하여 동서를 넘나들며 찾아내고, 정립하며, 추구하고자 했던 보편적 가치는 우리의 외부 세계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바로 우리 자신의 생활과 문화, 그리고 정신세계 안에 내재해 있었던 셈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것을 다만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흔히 20세기는 산업적 생산과 중앙 집중의 세기였다면, 이제 21세기는 문화적 가치와 다원화의 세기라고들 말한다. 그러한 점에서 성찰적 자세로 우리 자신의 내면을 다시 들여다보고, 21세기 새로운 시대에 부응하는 우리의 삶과 문화, 그리고 가치를 재발견해 내는 일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아시아문화중심도시를 조성하는 대 과업의 본질도 어떻게 보면 바로 우리 자신과 세계문화에 대한 이러한 성찰과 재발견의 맥락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다만 문제는 과연 우리는 우리의 어떠한 문화와 정신적 가치를 가지고 아시아와 교류하고 소통하는데 나설 것이냐 하는 것이다.

아시아문화중심도시조성에 관한 수많은 논의들 중에서 많은 이들이 아시아문화교류와 소통의 중심에 특히 광주5.18의 경험과 정신을 두어야한다고 지적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간과해서 안 될 점은 5.18의 경험과 정신은 일면적인 것이 아니고 다면적이고 다차원적이라는 사실이다. 한 예로 우리는 5.18을 통하여 투쟁과 항쟁이라는 동적(動的)이고 혁명적인 측면과, 도시 전체에서 도둑이 사라지고 완벽하게 질서가 유지된 정적(靜的)이며 통합적인 측면을 동시에 경험하였다. 불의에 대항하여 용맹스러운 시민들이 물리력으로 항거한 사실은 세계 곳곳에 역사적으로 무수히 많으나, 혁명적 상황에서 5.18의 광주에서처럼 사회적 질서가 완벽하게 지켜진 사례는 거의 없다. 바로 이러한 사실이 비교 문화적으로 주목을 받는다는 측면에서 이점은 특히 우리가 아시아와 교류하고 소통하여 미래의 문화를 일구어 가는데 중요한 단초를 제공해 준다. 다시 생각해 보아도 인구 백만이 넘는 대도시에서, 배경과 생각을 달리하는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5월 18일 이후 도청 앞 광장에 매일 수천에서 수만 명이 자발적으로 모여 한 마음을 표출하던 장면은 세계인이 오래 기억할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의 몫을 해냄으로써 결과적으로 하나의 힘으로 통합되어 큰 힘을 발하는 이러한 경험이 곧 광주의 5.18이 보여주는 ‘유일성’임과 동시에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이 민주주의로 가는 길목을 제시해주는 ‘보편성’이 만나는 대목이 된다. 다양성이 존중되면서 통일성을 이루어가는 이러한 경험을 오늘에 어떻게 되살려 아시아의 모든 사람과 나누어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문제의식이 곧 아시아문화중심도시조성사업의 추진과정에서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화두라는 생각을 한다.

아시아문화교류의 중심을 만드는 일이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새로운 각성과 발상의 전환이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서 먼저 일어나야한다는 점이다. 우선 필요한 자세는 아시아인들과 나눌 수 있는 우리의 문화적 자산을 재발견하여 갈고 닦는 일에 게으르지 말아야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이는 개방적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한다. 창의적인 생각과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환영받고 활동하며 살아갈 수 있는 열린 도시가 바로 우리가 바라는 광주의 미래인 것이다.